방하착(放下着) ~~글쓴이 : 보산 정용장 등록일 : 2011.03.3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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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착(放下着)
1.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아라,
또는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온갖 번뇌, 갈등, 스트레스, 원망, 집착 등이 얽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모두 홀가분하게 벗어 던져버려라는 말이 방하착입니다.
방상착(放上着)이라는 말은 표현이 어색하군요.
아래에 조주스님이 말씀하셨다는
"그러면 지고 가거라(着得去 : 착득거). "라는 말이
방하착(放下着)의 반대말입니다.
조주(趙州 778∼897) 스님한테
엄양(嚴陽) 스님이란 분이 가서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참선(參禪)에서는
한 물건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물질적인 물건보다도
우리 마음으로 시(是)야, 비(非)야, 좋다, 궂다,
이쁘다, 밉다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니까 조주 스님께서 말씀이
"놔 버려라, 방하착(放下着)하라" 하니까,
그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놓을 것입니까?
가지고 있어야 놓을 것인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새삼스럽게 놓을 것입니까?"
그러니까 조주 스님께서
"그러면 지고 가거라" (着得去 : 착득거) 하셨습니다.
2.
방하착(放下着)의 착(着)은
그냥 붙은 글자로 아무런 뜻도 없다.
옛날 중국의 엄존자(嚴尊者)라는 수행자가
조주화상(趙州和尙(776-897)에게
일물부장래(一物不將來)한 때는 여하히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털이일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물었다.
조주화상의 대답은(放下着)이였다.
엄존자는 물고 늘어지며, 버리라고 하시지만 빈털털이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버릴 것이 없지 않느냐고
"일물부장래"인데 무엇을 방하할수 있느냐? 하고, 반론(反論)했다.
그러자 조주화상은
"그렇다면 담취(擔取)하여 가라."고
방하하는 마음을 뚜렸이 했다.
담취하여 가라, 란 반어(反語)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지고 가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의식까지도 버리라는 방하(放下)의 방하다.
선자(禪者)는 이것을 쉬운 말로
"짐을 지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경계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무엇인가를 짊어지고 있다.
명함의 직함은 어깨의 짐의 일람표다.
그 사람이 때로는 그것을 방하해 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저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겸손함을 발휘한다.
즉
일물부장래(一物不將來)를 표방하는 것인데 꼬리가 보인다.
선자는 이것을 비하만(卑下慢)이라고 때려 눕힌다.
비하(卑下)라는 이름의 고만(高慢)을 걸머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주화상에게 담취하여 가라고 호령을 듣게 된 까닭도 이것이다.
직함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유무에 구애되지 말고
어디서든지 주(主)가 되는 것이 방하착이다.
인생은 나그네다.
나그네에게 짐은 으레 따르는 법이다.
우리들의 일생동안 계속해서 만드는 몸과 입과 마음의 짐은
좋건 나쁘건 인생의 종착역까지 자기가 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도 나누어 져다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에서-
3.
"목탁소리"
+ 제 목 : 방하착(放下着)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일 터입니다.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는,
끊임없이 닥치는대로 붙잡는 일일 터입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
''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고(苦),
아! 괴로움! 괴로움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버려야 할 듯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욕망을 가득 채워 줄 만큼
무한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잡음''으로 인해 행복하고저 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음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인연따라 잠시 나에게 온 것 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연따라 잠시 온 것을
''내 것''이라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바로 ''내 것''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아상(我相) 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내 것''을 늘림으로 인해서는,
''잡음''으로 인해서는
결코 행복이며, 자유, 진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放下着)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입니다.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습니다.
''나'' ''내것''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놓음...
방하착(放下着)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선입견을 녹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방하착(放下着)!! 그 속에
불교 수행의 모든 체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방하착...
방(放)은 ''놓는다''는 뜻이며,
착(着)은 ''집착, 걸림''을 의미합니다.
즉 본래 공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 ''내것''에만 끄달려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참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나의 자리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방하착,
방하착 하니 많은 이들이 의심을 가집니다.
그러면 다 놓고 나면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돌처럼 바위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방하착(着)이란
착심(着心)을 놓으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멍 하니 바보처럼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
마땅히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일입니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살아갈 일입니다.
다만 마음을 한 쪽으로 머물러
착(着)을 두어선 안됩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은
복을 까먹는 일일 뿐입니다.
적극적으로 복을 짓고
순간 순간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 밝은 깨침의 마음으로
늘 순간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벌되 돈에 대한 '집착'으로 벌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 그 자체에 마음이 머물면
많이 벌게 될 때 즐거울 수 있지만
돈을 벌지 못하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돈에대한 집착을 놓으면
많이 벌어야 한다는 집착을 놓았기에
적게 벌어도 여여(如如)하며,
많은 돈을 벌었어도 다른 이를 위해 보시를 할 때
아깝다는 마음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돈에 대해 집착이 없으니
돈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을 해야지
'집착'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이 떠나가더라도
그 사람이 잘 된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집착'이라면
나와 함께 해서 괴롭더라도 붙잡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고 괴롭히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입니다.
'내 여자' '내 남자'라고 하는
또 다른 아상일 뿐입니다.
상대방이 '내것'이라는 생각
나 좋은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아집(我執)'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맑고 순수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라는 도리인 것입니다.
이렇듯 집착을 놓아버리는 일이야말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연장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 올라오는 경계를 그저 주인공,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참나라고 하는
그 지고함 속에 넣고 녹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녹이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경계를 이렇듯
내 안에 밝은 자리에 놓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방하착(放下着)..
놓고 가는 이는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며,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기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여여합니다.
함이 없이 늘 묵묵히 일을 해 나갑니다.
이렇듯 함이 없이 해야합니다. 일을 하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끼어들면 위험합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 "내가 한다"고 하는
그 아상, 아집을 놓고 가는 것입니다.
방하착엔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기에
설령 괴로운 경계가 닥치더라도
괴로움의 주체가 없기에
하나도 괴로울 게 없습니다.
내가 괴로워야 하는데
아상을 놓았으니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괴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괴로움"이란 현상만 있을 뿐
내가 괴롭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놓고 나면 이렇게 자유롭습니다.
콩나물 소묘 素描
詩 : 청호 정용장
오죽 烏竹을 닮아
탐욕을 비운 텅 빈 가슴이런가
백합 白合을 닮아
서설처럼 정결한 여린 마음이런가
선방 禪房 스님을 닮아
돈오 頓悟에 든 청아한 몸이런가
씨앗을 품을 수 없는
절망의 파고에 휘돌기를 당해도
체념의 멍에를 슬퍼하지 않고
다소곳이 미소짓는
결고운 너의 심성이 좋았더라
잎눈을 틔우지 못해 고개 숙인
애잔한 너의 마음자리를 찾아
소망 보시기 안에
연민의 정 한 모금 담아
정갈한 생명수로 나신 裸身을 씻어 준다.
* 돈오(頓悟) : 문득 깨달음
1.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아라,
또는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온갖 번뇌, 갈등, 스트레스, 원망, 집착 등이 얽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모두 홀가분하게 벗어 던져버려라는 말이 방하착입니다.
방상착(放上着)이라는 말은 표현이 어색하군요.
아래에 조주스님이 말씀하셨다는
"그러면 지고 가거라(着得去 : 착득거). "라는 말이
방하착(放下着)의 반대말입니다.
조주(趙州 778∼897) 스님한테
엄양(嚴陽) 스님이란 분이 가서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참선(參禪)에서는
한 물건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물질적인 물건보다도
우리 마음으로 시(是)야, 비(非)야, 좋다, 궂다,
이쁘다, 밉다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니까 조주 스님께서 말씀이
"놔 버려라, 방하착(放下着)하라" 하니까,
그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놓을 것입니까?
가지고 있어야 놓을 것인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새삼스럽게 놓을 것입니까?"
그러니까 조주 스님께서
"그러면 지고 가거라" (着得去 : 착득거) 하셨습니다.
2.
방하착(放下着)의 착(着)은
그냥 붙은 글자로 아무런 뜻도 없다.
옛날 중국의 엄존자(嚴尊者)라는 수행자가
조주화상(趙州和尙(776-897)에게
일물부장래(一物不將來)한 때는 여하히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털이일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물었다.
조주화상의 대답은(放下着)이였다.
엄존자는 물고 늘어지며, 버리라고 하시지만 빈털털이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버릴 것이 없지 않느냐고
"일물부장래"인데 무엇을 방하할수 있느냐? 하고, 반론(反論)했다.
그러자 조주화상은
"그렇다면 담취(擔取)하여 가라."고
방하하는 마음을 뚜렸이 했다.
담취하여 가라, 란 반어(反語)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지고 가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의식까지도 버리라는 방하(放下)의 방하다.
선자(禪者)는 이것을 쉬운 말로
"짐을 지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경계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무엇인가를 짊어지고 있다.
명함의 직함은 어깨의 짐의 일람표다.
그 사람이 때로는 그것을 방하해 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저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겸손함을 발휘한다.
즉
일물부장래(一物不將來)를 표방하는 것인데 꼬리가 보인다.
선자는 이것을 비하만(卑下慢)이라고 때려 눕힌다.
비하(卑下)라는 이름의 고만(高慢)을 걸머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주화상에게 담취하여 가라고 호령을 듣게 된 까닭도 이것이다.
직함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유무에 구애되지 말고
어디서든지 주(主)가 되는 것이 방하착이다.
인생은 나그네다.
나그네에게 짐은 으레 따르는 법이다.
우리들의 일생동안 계속해서 만드는 몸과 입과 마음의 짐은
좋건 나쁘건 인생의 종착역까지 자기가 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도 나누어 져다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에서-
3.
"목탁소리"
+ 제 목 : 방하착(放下着)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채우는 일일 터입니다.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는,
끊임없이 닥치는대로 붙잡는 일일 터입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무한히 붙잡는 삶...
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
''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고(苦),
아! 괴로움! 괴로움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버려야 할 듯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지식이든...
그 무엇이든 우리의 욕망을 가득 채워 줄 만큼
무한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잡음''으로 인해 행복하고저 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음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인연따라 잠시 나에게 온 것 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연따라 잠시 온 것을
''내 것''이라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바로 ''내 것''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아상(我相) 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내 것''을 늘림으로 인해서는,
''잡음''으로 인해서는
결코 행복이며, 자유, 진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放下着)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입니다.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습니다.
''나'' ''내것''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놓음...
방하착(放下着)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선입견을 녹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방하착(放下着)!! 그 속에
불교 수행의 모든 체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방하착...
방(放)은 ''놓는다''는 뜻이며,
착(着)은 ''집착, 걸림''을 의미합니다.
즉 본래 공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 ''내것''에만 끄달려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참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나의 자리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방하착,
방하착 하니 많은 이들이 의심을 가집니다.
그러면 다 놓고 나면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돌처럼 바위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방하착(着)이란
착심(着心)을 놓으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멍 하니 바보처럼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
마땅히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일입니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살아갈 일입니다.
다만 마음을 한 쪽으로 머물러
착(着)을 두어선 안됩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은
복을 까먹는 일일 뿐입니다.
적극적으로 복을 짓고
순간 순간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 밝은 깨침의 마음으로
늘 순간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벌되 돈에 대한 '집착'으로 벌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 그 자체에 마음이 머물면
많이 벌게 될 때 즐거울 수 있지만
돈을 벌지 못하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돈에대한 집착을 놓으면
많이 벌어야 한다는 집착을 놓았기에
적게 벌어도 여여(如如)하며,
많은 돈을 벌었어도 다른 이를 위해 보시를 할 때
아깝다는 마음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돈에 대해 집착이 없으니
돈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을 해야지
'집착'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이 떠나가더라도
그 사람이 잘 된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집착'이라면
나와 함께 해서 괴롭더라도 붙잡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고 괴롭히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입니다.
'내 여자' '내 남자'라고 하는
또 다른 아상일 뿐입니다.
상대방이 '내것'이라는 생각
나 좋은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아집(我執)'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맑고 순수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라는 도리인 것입니다.
이렇듯 집착을 놓아버리는 일이야말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연장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 올라오는 경계를 그저 주인공,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참나라고 하는
그 지고함 속에 넣고 녹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녹이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경계를 이렇듯
내 안에 밝은 자리에 놓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방하착(放下着)..
놓고 가는 이는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며,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기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여여합니다.
함이 없이 늘 묵묵히 일을 해 나갑니다.
이렇듯 함이 없이 해야합니다. 일을 하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끼어들면 위험합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 "내가 한다"고 하는
그 아상, 아집을 놓고 가는 것입니다.
방하착엔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기에
설령 괴로운 경계가 닥치더라도
괴로움의 주체가 없기에
하나도 괴로울 게 없습니다.
내가 괴로워야 하는데
아상을 놓았으니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괴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괴로움"이란 현상만 있을 뿐
내가 괴롭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놓고 나면 이렇게 자유롭습니다.
콩나물 소묘 素描
詩 : 청호 정용장
오죽 烏竹을 닮아
탐욕을 비운 텅 빈 가슴이런가
백합 白合을 닮아
서설처럼 정결한 여린 마음이런가
선방 禪房 스님을 닮아
돈오 頓悟에 든 청아한 몸이런가
씨앗을 품을 수 없는
절망의 파고에 휘돌기를 당해도
체념의 멍에를 슬퍼하지 않고
다소곳이 미소짓는
결고운 너의 심성이 좋았더라
잎눈을 틔우지 못해 고개 숙인
애잔한 너의 마음자리를 찾아
소망 보시기 안에
연민의 정 한 모금 담아
정갈한 생명수로 나신 裸身을 씻어 준다.
* 돈오(頓悟) : 문득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