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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일기

    나의 행자시절 - 영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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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처럼 구름처럼 신령스럽게" (영운 / 은해사 백흥암 선원장) - 해인 2006년 3월호
     
    생각해보건대, 나는 아마 오랜 생을 출가수행자로 살았을 것이다.
    중학교 때 먼 산을 바보라며 '김삿갓처럼 돌아다녀야지…' 하는 생각을 했고,
    동네분들을 모셔다가 〈팔상록〉을 읽어드리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다.
     
    불심이 깊으셨던 어머닌 정성스레 먹물을 들여 스님네들 옷을 지어드리기도 했으니, 내가 출가를 하고 나자
    나의 영웅 스님! 사바세계는 고해이니 이쪽에는 뜻도 두지 마시고 귀한 출가를 하셨으니 열심히 정진하시어 해탈하시길 바랍니다"라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의 출가의 길을 격려해주셨던 것이다.
     
    누가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있는 창녕의 한 교당에 가서 한 스님께 여쭈었다.
    "출가를 하려고 합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천거해주세요."
     
    그 스님은 내가 갈 만한 여러 절을 종이에 쓰고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연이었나보다.
    죽 짚어나가는 스님의 손길이 "석남사"에 머물렀을 때 내가 얼른 말했다.
    "아… 저 여기 석남사에 가겠습니다"라고.
     
    그러자 그 스님이 물었다."석남사는 굉장히 규율이 엄한데? 그리고 매일 108배를 하는데?"
     
    어머니가 불심이 깊으셨다고 하나 불법이 무엇인지, 출가한다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니 석남사라는 절이 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런데 그렇게 선뜻 끌렸던 걸 보면 전생에 석남사와 깊은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석남사로 가기로 결정하고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짐을 꾸렸다.
    어머니가 바느질하시다 남긴 먹물조각(절에서 그것이 필요한 줄 알았다)과 옥편을 가방에 넣었다.
     
    해가 넘어가는 석양 무렵 석남사에서 도착했더니, 작은 방으로 안내해주면서 "여기서 며칠 있으라"고 했다.
    첫날, 시키는 대로 방에 앉아 있자니 좌불안석이었다.
    저녁공양을 하고 들어와 앉았는데 밤이 되어도 눕지를 못했다.
     
    이틀 후인가 드디어 행자님 한 분이 오더니, "좀 나오셔서 일 좀 거드실래요?" 하는 것 아닌가.
    얼마나 반가운지 구르듯 뛰어나가 후원에서 도라지 까는 것을 돕고 있으려니 합격이라도 된 듯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사흘 후, 출타하셨던 "가지산 호랑이"라고 불리던 인홍 스님(당시 주지스님)이 오시자 비로소 면접을 하고 석남사 사람이 되었다.
    "능엄주"를 외우고 백팔배를 하고 후원일을 도우면서 행자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절에 들어가자마자 부모님이나 세속 일들이 아주 먼 옛날처럼 생각되었다.
    속가에 살면서도 내 자신이 여성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다.
    여성은 비누로 세수를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도 지키지 않았고, 오라버니 친구들이 수시로 집에 놀러와도예사로 여겼다.
     
    석남사에는 신선들만 사는 줄 알았다. 어느날, 목욕탕 문을 열었다가
    "아! 여기는 비구니스님들만 목욕하는 곳이구나" 하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선승이었던 나의 은사스님은 그런 나를 두고 "너무 때가 안 묻고 순진하구나" 하셨다.
     
    출가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하루는 나의 노스님이 되신 인홍 스님께서 "성철 큰스님을 친견하러 가는데 데리고 갈 테니 질문드릴 것을 준비해라" 하셨다.
    김용사에서 뵌 큰스님은 연세가 굉장히 많으신 줄 알았는데 아주 젊어 보이셨다.
    깨끗한 피부에 눈빛이 맑고 형형하셨던 큰스님께선 어린 행자에게 "영운靈雲"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신령스럽게 살라!"고.
     
    당시 김용사 양진암에 계시면서 정진하시던 혜춘 스님은 내 이름을 들으시더니 박수를 치시며 격려해주었다.
    "이름이 참 좋아… 영운조사!"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평생 내 출가의 삶과 함께 했던 귀중한 이름을 받던 날, 나는 큰스님께 준비해 가지고 간 질문을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스님의 답을 잊지 못한다.
    눈에 푸른 빛을 내뿜고 있던 큰스님께 여쭈었다.
     
    "큰스님! 복과 혜慧 중에 복이 먼저입니까? 혜가 먼저입니까?"
     
    나의 은사스님은 연비를 하셨다.
    곁의 사람들 말이 "공부를 잘 하시려고 부처님께 손을 바치셨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행자일 때 별좌 소임을 사셨는데 항상 일을 하시고 나면 끙끙 소리를 내며 앓으셨다.
    어린 소견에 나는 은사스님의 몸이 약한 것이 그 연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공부를 위해서 손을 부처님께 올리는 게 좋은가,
    아니면 두 손을 다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좋은가, 그것이 그리도 궁금했던 것이다.
     
    큰스님께선 이렇게 답을 주셨다.
    "복혜는 쌍수라. 두 수레바퀴와 같아서 하나만 기울어져도 구를 수 없으니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큰스님은 또 참회법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사람은 살면서 항상 업을 짓기 때문에 늘 참회 절을 해야 한다."
    어린 행자인 내가 물었다.
    "살면서 매일 업을 쌓고 또 쌓는데 절은 왜 합니까?"
    "낙엽 떨어진 가을날 마당을 쓰는 것과 쓸지 않는 것은 천지 차이란다.
    매일 쓸다 보면 어느 날엔가 깨끗해지는 날이 오는 법이야."
    행자시절로부터 삼십여 년쯤 후, 출가절인 석남사 주지를 맡아갔다.
    제방 선원에서 선객으로만 지내다가 대중의 부름을 받고 소임을 살러 간 그곳에서 나는 신도분들에게 제일 먼저,
    그 옛날 큰스님이 해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서 참회기도를 권했으니, 행자시절 큰스님께 들은 참회법문이 그처럼 깊게 각인되었던 것이다.
     
    어린 행자를 앉혀놓고 그토록 자상하게 법문을 해주셨던 성철큰스님은 그후,
    화두를 받으러 간 내게 "육조단경을 외워서 화두공부를 하라"는 가르침을 주셨고,
    공부를 하다가 상기병이 나서 찾아뵙자 또 잊을 수 없는 법문을 내리셨다.
     
    상기병에 대한 말씀과 하루 700배 숙제를 받고 물러나와 백련암 마당 한가운데쯤 걸어갈 때였다.
    마루 끝의 문이 열리면서 큰스님께서 부르셨다.
     "영운아!"
    웬일이신가 하고 돌아서서 합장드리니 큰스님께서 그러셨다.
    "정진 열심히 하거라…!"
    그리고는 바로 문이 닫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아직도 큰스님의 그 음성,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한 말씀이 출가 수행정진의 길에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 일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 큰스님은 아니 계시고 그때 생각만 나면 눈시울만 뜨거워진다.
    열아홉에 석남사에 들어가 스물한 살에 사미니계를 받고 곧 서기 소임을 보았는데, 새벽예불을 막 마친 어느 날 노스님께서 부르시는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노스님께선 대들보가날아갈 정도로 쩌렁쩌렁 야단을 치시기 시작했다.
    "네가 본 바가 이리 없어 어찌 하겠느냐?" 하시면서 내놓으시는데 보니, 며칠 전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서 써낸 나의 답지였다.
    노스님께선 석남사 강당방 식구들에게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나는 며칠 동안 고민 고민을 했다.
    마음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다 쓸 수는 없고, 줄이고 또 줄이다 보니 딱 두 글자가 남았다.
    "인욕"이었다.
    그래서 조그만 쪽지에다 두 글자를 써서 냈는데, 성의 없이 짧게 쓴 것과 그런 나를 본받아 다른 학인들도 짧게 써냈다는 것이 날벼락을 맞은 이유였다.
     
    그로부터 어느덧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린 나이에 생각해 내었던 "인욕"이라는 두 글자는 지금 생각해도 적합한 답이었다.
    수행자는 "인욕"이라는 바탕 위에서 "성불"로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행자시절은 그 인욕을 배우는 가장 긴장된 시절이니, 그 중요함을 말해서 무엇하리.
     
    지난해 초여름, 6년 동안의 출가절 주지 소임을 마치고 이곳 백흥암 선원으로 돌아오니 마치 공부를 다해 마친 듯 이리 한적할 수가 없다.
    이 한가로움이 너무 감사해서 지나는 바람에도 흘러가는 물에도 절을 한다.
    저 행자시절의 "인욕"이라는 공덕을 쌓지 않았다면 이 감사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