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의 이해 불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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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붓다-프라미타(buddha-pratima)라 하는데, 프라티마(pratima)란 말은 모방 또는 모사를 뜻하는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불상이란 말은 본래 부처님의 참모습을 모방, 모사한 것이라는 뜻에서 부처님의 형상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나타낸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보통 불상을 포함하여 보살상, 신장상, 조사상 등 불교에 나타나는 모든 존상을 통틀어 말한다.
부처님 모습을 조성한 것이 언제 어디서 처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종교적 입장에서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이미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증일아함경' 등 여러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 하늘 나라에 올라가 마야 부인을 위해 설법하시는 동안 부처님을 사모하던 코삼비 나라의 우다야나(Udayana)왕에 의해서 처음으로 만들어져 공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술사적인 입장에서는 이러한 경전의 내용은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 꾸며진 전설이며 지금까지 얻어진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불멸 후 5세기가 지나서 서력기원을 전후한 무렵에 인도의 간다라(Gandhara) 지방과 마투라(Mathura) 지방에서 각각 불상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두 곳에서 불상이 출현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으나, 불상이 불멸 후 5세기가 지난 후에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연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불상 출현(出現)의 배경(背景)에 관한 견해 중 널리 받아지는 것은 대승불교의 흥기와 더불어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견해와 더불어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그리이스의 신상(神像) 조각이 들어오면서 직접적으로 불상의 조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그를 따르던 제자와 일반 신도들은 부처님을 기리는 마음에서 사리(sarira)를 봉안한 탑을 세우거나, 생전에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곳에 기념물을 세우고 예배 공양하고 탑의 동서남북의 네 곳에 탑문(塔門)과 난간(欄干)에는 부처님의 생애나 부처님의 전생이야기(本生談, jataka)를 부조로 새겨놓았으나 이 곳에도 직접적인 부처님의 모습은 표현하지 않고 탑이나 성수(聖樹), 윤보(輪寶), 삼보표지(三寶標指), 불족적(佛足蹟), 불좌(佛坐) 등 부처님의 존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직접적인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시기를 일러 이른바 무불상(無佛像) 시대라고 한다. 상징적 표현은 실재(實在)하는 부처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부처님의 일생 가운데 특히 중요한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어, 기능면에 있어서도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동시에 설화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상징물은 부처님의 생애나 전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빈번히 나타나며, 이 때 다른 인물들은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사람들 중에 오직 상징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는 부처님의 존재는 보다 큰 순수성과 정신성을 나타내는 극적인 대비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상징적 표현은 처음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점차 의식적인 행위로 바뀌면서 초월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행하여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상징적 표현은 인간의 형상을 갖추게 되고, 이것을 교리적으로 불타관(佛陀觀) 내지는 불신관(佛身觀)의 변화라고 일컫는다.
부처님 모습을 조성한 것이 언제 어디서 처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종교적 입장에서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이미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증일아함경' 등 여러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 하늘 나라에 올라가 마야 부인을 위해 설법하시는 동안 부처님을 사모하던 코삼비 나라의 우다야나(Udayana)왕에 의해서 처음으로 만들어져 공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술사적인 입장에서는 이러한 경전의 내용은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 꾸며진 전설이며 지금까지 얻어진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불멸 후 5세기가 지나서 서력기원을 전후한 무렵에 인도의 간다라(Gandhara) 지방과 마투라(Mathura) 지방에서 각각 불상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두 곳에서 불상이 출현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으나, 불상이 불멸 후 5세기가 지난 후에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연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불상 출현(出現)의 배경(背景)에 관한 견해 중 널리 받아지는 것은 대승불교의 흥기와 더불어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견해와 더불어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그리이스의 신상(神像) 조각이 들어오면서 직접적으로 불상의 조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그를 따르던 제자와 일반 신도들은 부처님을 기리는 마음에서 사리(sarira)를 봉안한 탑을 세우거나, 생전에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곳에 기념물을 세우고 예배 공양하고 탑의 동서남북의 네 곳에 탑문(塔門)과 난간(欄干)에는 부처님의 생애나 부처님의 전생이야기(本生談, jataka)를 부조로 새겨놓았으나 이 곳에도 직접적인 부처님의 모습은 표현하지 않고 탑이나 성수(聖樹), 윤보(輪寶), 삼보표지(三寶標指), 불족적(佛足蹟), 불좌(佛坐) 등 부처님의 존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직접적인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시기를 일러 이른바 무불상(無佛像) 시대라고 한다. 상징적 표현은 실재(實在)하는 부처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부처님의 일생 가운데 특히 중요한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어, 기능면에 있어서도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동시에 설화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상징물은 부처님의 생애나 전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빈번히 나타나며, 이 때 다른 인물들은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사람들 중에 오직 상징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는 부처님의 존재는 보다 큰 순수성과 정신성을 나타내는 극적인 대비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상징적 표현은 처음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점차 의식적인 행위로 바뀌면서 초월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행하여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상징적 표현은 인간의 형상을 갖추게 되고, 이것을 교리적으로 불타관(佛陀觀) 내지는 불신관(佛身觀)의 변화라고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