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스님의 어제와 오늘 <中> 인물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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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2003-03-12
세계 최대 비구니 교단 꽃 피웠다
비구니 승가의 탄생 과정에 대해서는 팔리 ‘율장’의 ‘소품’ 대중부의 ‘비구니 율장’, ‘율장’의 ‘비구니 분별’등에 나타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모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사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자 부처님은 세 번이나 거절한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에게 출가를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부처님은 ‘팔경계’를 수락한다는 전제하에 교리와 계율에 따른 사문생활에 임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한다.
기원전 3세기 경에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비구의 친 누이인 상가미타 비구니가 스리랑카에 비구니 교단을 설립한다. 스리랑카의 데바사라 비구니는 436년 도반들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비구니 승가를 설립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10세기경 비구니 교단이 사라진다. 비구 승가가 분열하면서 팔경계법에 따라 비구들의 지도를 받아야하는 비구니 교단이 자연스럽게 소멸됐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 최근 태국과 스리랑카 등지에서는 불교 여성들 사이에서 비구니 승가를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상좌불교권과 달리 한국 대만 홍콩 등 대승불교권에서는 비구니 교단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을 숨겨주었던 모례의 누이 사씨(史氏). 백제의 법명등 많은 비구니들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 동국대 해주스님에 따르면 조선 문정왕후 시대에는 내원당으로 자수 인수 두 비구니 스님의 사원이 건립되어 5000명에 이르는 비구니들이 수행했다고 한다.
법희스님 등 비구니 법통 계승 일엽스님 등 수많은 후학 배출
근대에 접어들어 선풍이 다시 진작돼 많은 고승이 나타나면서 덩달아 단절되었던 비구니 법통도 되살아난다. 비구들의 부침에 따라 비구니 교단도 절대적 영향을 받는 그간의 전통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근대 비구니 법통이 되살아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스님은 경허스님의 제자 만공스님. 스님은 수덕사에 머물며 제방에서 수행하다 찾아오는 비구니 스님들을 제접, 법을 인가해 비구니 교단을 되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근대 비구니 선맥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법희스님을 비롯,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최초의 비구니 선방을 개설한 만성스님, 한국비구니계 최대 문중을 형성한 선객 본공스님, 신문학 초기의 최초의 여류문인으로 신여성 운동을 주도하다 불문에 귀의한 일엽스님, 일타스님의 누나로 20여년간 견성암에 머물며 후학들을 제접했던 응민스님 등은 모두 만공스님에게서 법을 인가받았다.
청담스님 자운스님 성철스님 등도 명성을 듣고 찾아온 비구니 스님들을 제접하며 비구니 선풍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이며 청담스님의 친딸인 묘엄스님의 은사 월혜스님은 청담스님과의 인연으로 출가, 성철 자운스님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단절되었던 비구니 법통을 다시 이은 법희스님(1887~1975)은 1901년 비구니 귀완스님을 은사로 출가,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원장으로 주석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배출했다. 비구니 3대 강백 중 한명으로 꼽히는 수옥스님을 비롯 삼각산 승가사 주지 상륜 스님등 100여명의 제자들이 있다.
비구니 총림원을 개설한 일엽스님의 문하에도 중앙종회의원 흥륜스님을 비롯 100여명의 제자들이 법을 잇고 있다. 본공스님의 제자들은 현재 한국비구니계의 최대 법맥을 형성하고 있다. 손상좌인 운문사 승가대학장 명성스님을 비롯 200여명이 넘는다.
비구니 강단도 없고 비구들도 마음껏 공부하기 힘들었던 1920년대에 대교과를 수료한 성문스님은 선교를 겸수하고 포교 교육에 남다른 모범을 보였다. 1950년대에 제자들에게 대학진학을 권장할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스님의 영향을 받아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동국대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전국비구니회 회장으로 있는 광우스님과 전국비구니회 이사장을 역임한 태호스님 등 스님의 제자들은 전법교화와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참선수행, 교학불사 포교 매진 94년 재범스님 최초 국장 임명
비구니 금강계단의 초대 존증아사리며 전국비구니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던 광호스님 문하에는 청암사 비구니 승가대학을 설립하고 현재 주지로 있는 지형스님 등이 있다. 또 근세 비구니계 3대강백인 금룡, 혜옥 수옥스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인 산청 대원사 선원을 연 법일스님, 조계종립 비구니 선원인 울산 석남사를 중창하고 선원을 연 인홍스님, 비구니 종단인 보문종을 창종한 긍탄스님 은영스님 등 수많은 비구니계의 큰 스님들이 한국을 세계 최대의 비구니 교단으로 세웠다.
수행과 교학불사 포교에 매진하던 비구니 스님들이 종단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종단개혁에 비구니 스님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부터다. 그 전까지 종단 개혁은 모두 비구스님들 만의 ‘불사’ 였지만 94년 개혁에는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이 적극 동참, 이해 종단 사상 최초로 포교국장에 비구니 재범스님이 임명됐다. 이후 교육원 포교원 연구직에 비구니스님이 계속해서 소임을 맡아오고 있으며, 중앙종회의원 수도 94년부터 10여명으로 늘어났다. - 박부영 기자
세계 최대 비구니 교단 꽃 피웠다
비구니 승가의 탄생 과정에 대해서는 팔리 ‘율장’의 ‘소품’ 대중부의 ‘비구니 율장’, ‘율장’의 ‘비구니 분별’등에 나타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모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사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자 부처님은 세 번이나 거절한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에게 출가를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부처님은 ‘팔경계’를 수락한다는 전제하에 교리와 계율에 따른 사문생활에 임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한다.
기원전 3세기 경에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비구의 친 누이인 상가미타 비구니가 스리랑카에 비구니 교단을 설립한다. 스리랑카의 데바사라 비구니는 436년 도반들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비구니 승가를 설립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10세기경 비구니 교단이 사라진다. 비구 승가가 분열하면서 팔경계법에 따라 비구들의 지도를 받아야하는 비구니 교단이 자연스럽게 소멸됐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 최근 태국과 스리랑카 등지에서는 불교 여성들 사이에서 비구니 승가를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상좌불교권과 달리 한국 대만 홍콩 등 대승불교권에서는 비구니 교단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을 숨겨주었던 모례의 누이 사씨(史氏). 백제의 법명등 많은 비구니들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 동국대 해주스님에 따르면 조선 문정왕후 시대에는 내원당으로 자수 인수 두 비구니 스님의 사원이 건립되어 5000명에 이르는 비구니들이 수행했다고 한다.
법희스님 등 비구니 법통 계승 일엽스님 등 수많은 후학 배출
근대에 접어들어 선풍이 다시 진작돼 많은 고승이 나타나면서 덩달아 단절되었던 비구니 법통도 되살아난다. 비구들의 부침에 따라 비구니 교단도 절대적 영향을 받는 그간의 전통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근대 비구니 법통이 되살아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스님은 경허스님의 제자 만공스님. 스님은 수덕사에 머물며 제방에서 수행하다 찾아오는 비구니 스님들을 제접, 법을 인가해 비구니 교단을 되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근대 비구니 선맥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법희스님을 비롯,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 최초의 비구니 선방을 개설한 만성스님, 한국비구니계 최대 문중을 형성한 선객 본공스님, 신문학 초기의 최초의 여류문인으로 신여성 운동을 주도하다 불문에 귀의한 일엽스님, 일타스님의 누나로 20여년간 견성암에 머물며 후학들을 제접했던 응민스님 등은 모두 만공스님에게서 법을 인가받았다.
청담스님 자운스님 성철스님 등도 명성을 듣고 찾아온 비구니 스님들을 제접하며 비구니 선풍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이며 청담스님의 친딸인 묘엄스님의 은사 월혜스님은 청담스님과의 인연으로 출가, 성철 자운스님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단절되었던 비구니 법통을 다시 이은 법희스님(1887~1975)은 1901년 비구니 귀완스님을 은사로 출가,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원장으로 주석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배출했다. 비구니 3대 강백 중 한명으로 꼽히는 수옥스님을 비롯 삼각산 승가사 주지 상륜 스님등 100여명의 제자들이 있다.
비구니 총림원을 개설한 일엽스님의 문하에도 중앙종회의원 흥륜스님을 비롯 100여명의 제자들이 법을 잇고 있다. 본공스님의 제자들은 현재 한국비구니계의 최대 법맥을 형성하고 있다. 손상좌인 운문사 승가대학장 명성스님을 비롯 200여명이 넘는다.
비구니 강단도 없고 비구들도 마음껏 공부하기 힘들었던 1920년대에 대교과를 수료한 성문스님은 선교를 겸수하고 포교 교육에 남다른 모범을 보였다. 1950년대에 제자들에게 대학진학을 권장할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스님의 영향을 받아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동국대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전국비구니회 회장으로 있는 광우스님과 전국비구니회 이사장을 역임한 태호스님 등 스님의 제자들은 전법교화와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참선수행, 교학불사 포교 매진 94년 재범스님 최초 국장 임명
비구니 금강계단의 초대 존증아사리며 전국비구니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던 광호스님 문하에는 청암사 비구니 승가대학을 설립하고 현재 주지로 있는 지형스님 등이 있다. 또 근세 비구니계 3대강백인 금룡, 혜옥 수옥스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인 산청 대원사 선원을 연 법일스님, 조계종립 비구니 선원인 울산 석남사를 중창하고 선원을 연 인홍스님, 비구니 종단인 보문종을 창종한 긍탄스님 은영스님 등 수많은 비구니계의 큰 스님들이 한국을 세계 최대의 비구니 교단으로 세웠다.
수행과 교학불사 포교에 매진하던 비구니 스님들이 종단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종단개혁에 비구니 스님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부터다. 그 전까지 종단 개혁은 모두 비구스님들 만의 ‘불사’ 였지만 94년 개혁에는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이 적극 동참, 이해 종단 사상 최초로 포교국장에 비구니 재범스님이 임명됐다. 이후 교육원 포교원 연구직에 비구니스님이 계속해서 소임을 맡아오고 있으며, 중앙종회의원 수도 94년부터 10여명으로 늘어났다. - 박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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