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없는 관문’뚫으며 한국불교 지키는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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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2000-03-21 1759호
한국불교의 저력
선 원
비구 48곳 등 모두 92곳서 정진
“각고수행으로 불교희망 싹 틔워”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 가운데 핵심은 마음(佛語心爲宗). ‘그 마음’은 1천6백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국불교를 지켜온 대들보였다. 마음을 조심(彫心)·조심(操心)하는 선원(禪院)을 “한국불교의 희망을 싹틔우는 난야(蘭若)”로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중심 수행기관’ 선원. 근대 이후 한국불교를 선도해온 선원은 어디이며, 몇 곳이나 될까. 전국선원수좌회가 최근 펴낸 〈기묘년(99년) 동안거 전국선원 정진대중 명단〉에 의하면 현존 선원은 총림선원 5곳, 비구선원 48곳,
비구니선원 36곳,
기초선원 1곳, 국외(해외)선원 2곳 등 모두 92곳. 이 곳에서 정진한 수행자의 수는 무려 1천6백31명. “한국불교가
제 모습을 지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바로 이들의 수행력 덕분”이라는 지적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92곳의 선원 가운데 근대적인 의미의 첫 선원 개원은 통도사 내원사 선원에서 이뤄진다. 1898년 석담유성스님이
상족(上足)인 설우·퇴운·완해 등 여러 스님들과 더불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 사명을 내원사로 개칭하고 동국제일선원이라 명명한 후 납자들을 제접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내원사는 55년 비구니 수옥(守玉)스님이 중창, 비구니선원으로 다시 출발하게 된다.
1년 뒤 개원된 해인사 퇴설(堆雪)선원은 근대한국불교 중흥조 경허스님(1849∼1912)이 처음으로 문을 연 선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1899년 봄 해인사 조실로 추대된 경허스님이 같은 해 11월 해인사 퇴설당에서 대중들과 함께 정혜결사를 결성하고,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을 지으면서 본격적인 선원이 개원된 것.
당시 선방에는 17명의 대중들이 결제에 들어갔으며, 원주는 제산(霽山)스님이었다. 용성스님 또한 1901년 퇴설선원
원주 제산스님과 법거량을 나누었고, 1915년엔 경봉스님이 퇴설선원에서 제산스님을 조실로 정진하기도 했다.
퇴설선원과 거의 동시에 통도사 백운암에 백운선원이 개설됐고, 1899년 겨울 경허스님이 청암사 수도암에 선원을
개원했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선원이 속속 문을 열었다.
경허스님이 1900년 봄 송광사를 비롯하여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백장암, 영원사 등지에 잇따라 선원을 개원한 것.
동시에 벽송사 쌍계사 태안사 대둔사 등 호남일대에서도 선풍을 일으키며 선원을 창설, 근대 한국불교 중흥의 전기를
마련한다.
1900년 여름에는 경허스님이 영남지방으로 순행하며 통도사 표충사 백운암 동화사 대승사 윤필암 파계사 등에 선원을 개원, 삼남지방에 선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같은 해 겨울에는 성월스님이 범어사 안양암에 안양선사(安養禪社)를, 탄정(坦靜)스님이 화엄사 견성암과 상원정사에
선원을 각각 새롭게 연다. 1901년에는 범어사 내원암에서 내원선사(內院禪社)가, 다음 해에는 계명암에서 계명선사와 고운사 고금선원이 또 다시 개원돼 선은 명실공히 근대한국불교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다.
1903년에는 울진 불영사에 선원이 개설됐고, 만공스님이 1905년 수덕사 금선대(金仙臺)에 선원을 개당한다. 1905년 한암스님은 통도사 내원암선원 조실로 참선대중을 제접하기 시작했으며, 용성스님은 1906년부터 해인사 백련암에서
수좌들을 맞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0년에는 범어사에 범어선원이 개설됐고, 같은 해 범어사는 한국불교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로 공식 인정받아
‘선찰대본산 확정(1913년)’을 기다리게 됐다.
선원 개원은 물론 삼남지방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1913년 용선(龍船)스님이 금강산 장안사에 영원암 선원(靈源庵 禪院)을 개원한 것을 시작으로, 안변 석왕사에서 내원선원이 연이어 개설됐다.
1914년에는 백양사에 고불선원이, 1915년에는 김룡사 금선대, 대승사 윤필암, 남장사 관음전, 용문사 두운암 등이 선원으로 지정됐다. 1916년은 한국 비구니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해로 기록되게 된다.
법희(法喜)스님이 수덕사 견성암에서 오도(悟道), 비구니 선맥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1926년 만공스님은 〈견성암 방함록서〉를 쓰면서 견성암선원은 명실상부한 비구니선원으로 자리잡게 되며, “근·현대 비구니 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선원총람〉고 평가된다.
1923년 설운스님이 백담사 오세암에 오세선원을, 혜월스님이 1923년 부산 선암사에 소림선원을, 다음 해 학명스님이 내장사에 벽련선원을 각각 창설하는 등 20년대 들어서도 새로운 선원이 속속 불교계에 등장했다.
그러던 1925년 용성스님이 새로운 결사를 시도한다. 같은 해 11월22일 망월사 선원에서 용성스님이 50여 명의 대중과 ‘만일선회결사(萬日禪會結社)’를 시작한 것. 다음해 통도사 내원암으로 옮겨 계속된 선회결사는 새로운 신행결사체였다.
1927년 비구니 성문스님이 대구 동화사 부도암에서 부도암선원을 개원하며, 금강산 신계사에서는 미륵암 선원이 새로이 문을 열어 납자들을 받기 시작했다. 다음 해 경봉스님이 통도사 극락암에 극락호국선원을, 29년에는 월초스님이 봉선사에 선원을 개설해 봉선사 면모를 새로이 다지기 시작했다.
30년대 들어서도 선원 개원·재(再)개원은 이어졌으며, 전국수좌대회가 열려 수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30년 태조선원이 선산 도리사에 개원됐으며, 31년 선학원에서 적음스님이 전국수좌대회를 개최해 수좌들의 모임이 상례화되기 시작했다.
선학원은 특히 1932년 〈선원〉지를 창간, 선의 대중화에까지 힘을 쏟기 시작했다. 36년에는 금산사 서래선원이 문을 열었고, 비구니 본공스님은 37년 오대산 지장암에 선원을 설립해 비구니 납자 제접을 본격화했다.
10년 뒤인 47년 한국 근·현대불교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결사가 봉암사에서 이뤄진다. 성철·청안·우봉·자운·향곡·청담·혜암스님 등 20여 명의 수좌가 공주규약(供住規約)을 체결하고, 봉암사결사를 맺어 한국불교에 새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계속되던 선원 개원·설립, 결사 운동은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잠시 주춤하게 된다.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전국 대부분의 선원이 폐원되고, 부산 범어사와 선암사 등 일부 선원에서만 수선 대중들이 정진할 수 있게 됐다.
전쟁이 끝나자, 주춤한 것도 잠시, 이 곳 저 곳에서 선원들이 다시 개원되기 시작했다. 57년 4월 비구니 인홍스님이
석남사에 정수선원을, 비구니 상명스님이 동화사 부도암에 선원을, 비구니 만허스님이 진주 대원사에 비구니 선원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각각 개원해 비구니 수행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58년에도 비구니 선원 개원은 이어졌다. 비구니 성진스님이 동화사 양진암에 선원을, 비구니 수옥스님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통도사 내원사에 선원을 열었고, 59년에는 비구니 장일스님이 동화사 내원암에 선원을 다시 개원해 납자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63년에는 인천 용화사에 선원이 문을 열었으며, 65년에는 무문관이 우리 나라에 등장했다. 정영스님이 천축사에서 무문관을 개설했고, 여기에 제선·홍근·혜원·관응스님 등 22명의 납자가 제1차 6년 결사를 시작, 한국불교에 참신한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67년에는 동화사에서 선림회(禪林會) 창립총회가 열려 초대회장에 석암스님이 선출됐고, 당시 해인사에는 한국전쟁 후 첫 총림이 설치돼 성철스님이 초대방장으로 추대된다.
68년에는 비룡스님이 제주 천왕사에 영주선원을, 69년에는 전강스님이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월고·월남스님이 태백산 각화사에 선원을, 탄성스님이 법주사에 총지선원을 각각 열고 납자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70년 비구니 법공스님이 해인사 약수암에 선원을, 71년 녹원스님이 직지사에 천불선원을, 비구니 상륜스님이 승가사에 제일선원을 개설하면서 70년대를 맞이한다.
72년에는 천축사 무문관 제1차 6년 결사 회향이 이뤄졌으며, 75년 진제스님이 해운정사에 금모선원을, 76년 월산스님이 불국사에 선원을, 81년 비구니 육문스님이 은해사 백흥암에 선원을, 84년 휴암스님이 은해사 기기암 선원을 잇따라 열었다.
선원 개원은 최근에도 이어져 오현스님이 98년 백담사에 무금선원을, 수산스님이 불갑사에 무각선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조선조 5백년간의 억불을 끝내고, 한국불교가 근대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계속되는 선원 개원과 납자들의 끝없는 수행력 때문”이었다. 되풀이되는 종단 소요에도 한국불교가 굳건하게 자기 모습을 지킬 수 있었던 것 역시 선원과 납자들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았다.
근·현대 한국불교 희망의 산실이 선원·납자들이었던 것처럼, 그들의 가행정진은 내일의 한국불교까지 만들어 낼 것이다.
趙炳活기자 bhcho@buddhis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