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파계" -유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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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映畫 속에서의 話頭, 修行과 깨달음
① 파계
불교는 이름을 거짓이라 한다. 가명(假名)이므로, 우리는 그 이름에 속을 수 없다. 일단 침해와 묘혼의 파계를 괄호 속에 넣게 되면, 이내 <파계>는 계(戒)에 관한 영화가 아님을 알게 된다. <파계>는 정(定)과 혜(慧)에 관한 영화, 바로 선(禪)을 문제 삼고 있는 영화다. <파계>는 선불교를 다룬 영화이다.
선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얼굴,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드러내는 길이고, 드러나지 않는 본래면목을 겉으로 드러내는 수행법이다. 이 본래면목을 찾기에는 어떠한 군더더기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 자리는 지식이나 언어조차 발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을 전하는 신표(信標)로 의발(衣鉢)을 주고받음으로써 선사들 사이의 계보가 성립되는데, 이를 법통(法統)이라 한다. 원래 법통은 본래면목을 깨달은 자의 계보이지만 점차 법통을 얻는 것과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 되고 만다. 이 법통과 본래면목이 서로 길을 달리하는 자리에서 김기영 감독의 <파계>는 본래면목의 길(영화 속에는‘無’로 나타내고 있다.)에 나선 사람들보다 법통의 길에 나선 사람들을 주로 보여준다.
전화(戰火)속에서 헤매던 고아 침해(枕海)는 서산사(西山寺)의 고승 무불당(無佛堂) 법연(法然)선사에게 구출되어 입산수도하게 된다. 모든 일에 탁월해서 덕망 있는 젊은 승(僧)으로 성장한 침해(枕海)는 임종에 가까운 고승의 법통까지 이어받을 소수의 후보로서 경합하게 된다.
법통 싸움의 1라운드는 무불 스님이 거두어들인 올깎이의 대표 침해와 늦깎이의 대표 경원스님 사이에서 벌어진다. 처음에 제출된 문제는 단식(斷食)오래 하기. 그런데 함께 설탕물을 마심으로써 단식을 통한 싸움이 무승부로 끝나자, 법연 스님은 여자를 시험문제로 내민다. 저 유명한 ‘노파소암(老婆燒庵)’이라는 화두를 제시한 것이다. 여승들의 암자인 소원암으로부터 묘혼이 불려온다. 묘혼은 법연 스님의 요청으로 기꺼이 전라의 모습을 보이고‧‧‧, 침해 역시 전라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에 법연 스님은 침해를 법통의 싸움에서 제외시킨다. 이후 침해와 묘혼은 파계를 한다. <파계>는 실제 침해의 파계가 단지 계를 파하는 것으로 끝나는지, 아니면 법연 스님의 의도대로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귀일(歸一)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법통이 뭐 길래! 법연 스님 스스로, “난 법통을 차지하기 위해 무(無)를 깨닫지 못했으니 껍데기 불(佛)만 핥은 셈이다.”라고 뉘우치지만, 법통의식(法統意識)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하여튼 법연 스님은 침해를 통해서 가식(假飾)에 찬 법통의 길을 걸어온 그의 삶을 참회하고 싶었던 것 같다.
법통 싸움의 2라운드는 침해의 길벗 도심(度心)행자와 경원 스님의 대결로 이루어진다.
경원스님: “저 나무에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
도심행자: “내가 저 나무를 흔들어 불성을 쫓을 테니 똑똑히 보시오”
이 싸움은 올깎이들의 대표, “나는 법통은 싫다.”고 다짐했던 도심 행자의 승리로 귀결된다.
(신수와 혜능의 법통 싸움, 혜능의 법통에 대한 혜명의 도전, 신수에 대한 혜능의 승리 등을 생각 할 수 있다.)
침해는 경악하지만, 법연은 “무불당(無佛堂)!”의 외마디만 남긴 채 그대로 입적한다. 법연의 다비식(茶毗式)날 한 스님이 법연의 그러한 파계는 침해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라 한다. 고승은 죽어 말이 없다. 그러나 그의 높은 자비심은 불도(佛徒)에게 감명과 교훈을 주었다. <파계>는 불법에 뜻을 둔 젊은 선승(禪僧)들의 방황을 통해 계율과 인간적 가치의 충돌, 파계와 불법의 수행, 진리의 탐구를 보여준 영화이다.
① 파계
불교는 이름을 거짓이라 한다. 가명(假名)이므로, 우리는 그 이름에 속을 수 없다. 일단 침해와 묘혼의 파계를 괄호 속에 넣게 되면, 이내 <파계>는 계(戒)에 관한 영화가 아님을 알게 된다. <파계>는 정(定)과 혜(慧)에 관한 영화, 바로 선(禪)을 문제 삼고 있는 영화다. <파계>는 선불교를 다룬 영화이다.
선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얼굴,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드러내는 길이고, 드러나지 않는 본래면목을 겉으로 드러내는 수행법이다. 이 본래면목을 찾기에는 어떠한 군더더기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 자리는 지식이나 언어조차 발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을 전하는 신표(信標)로 의발(衣鉢)을 주고받음으로써 선사들 사이의 계보가 성립되는데, 이를 법통(法統)이라 한다. 원래 법통은 본래면목을 깨달은 자의 계보이지만 점차 법통을 얻는 것과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 되고 만다. 이 법통과 본래면목이 서로 길을 달리하는 자리에서 김기영 감독의 <파계>는 본래면목의 길(영화 속에는‘無’로 나타내고 있다.)에 나선 사람들보다 법통의 길에 나선 사람들을 주로 보여준다.
전화(戰火)속에서 헤매던 고아 침해(枕海)는 서산사(西山寺)의 고승 무불당(無佛堂) 법연(法然)선사에게 구출되어 입산수도하게 된다. 모든 일에 탁월해서 덕망 있는 젊은 승(僧)으로 성장한 침해(枕海)는 임종에 가까운 고승의 법통까지 이어받을 소수의 후보로서 경합하게 된다.
법통 싸움의 1라운드는 무불 스님이 거두어들인 올깎이의 대표 침해와 늦깎이의 대표 경원스님 사이에서 벌어진다. 처음에 제출된 문제는 단식(斷食)오래 하기. 그런데 함께 설탕물을 마심으로써 단식을 통한 싸움이 무승부로 끝나자, 법연 스님은 여자를 시험문제로 내민다. 저 유명한 ‘노파소암(老婆燒庵)’이라는 화두를 제시한 것이다. 여승들의 암자인 소원암으로부터 묘혼이 불려온다. 묘혼은 법연 스님의 요청으로 기꺼이 전라의 모습을 보이고‧‧‧, 침해 역시 전라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에 법연 스님은 침해를 법통의 싸움에서 제외시킨다. 이후 침해와 묘혼은 파계를 한다. <파계>는 실제 침해의 파계가 단지 계를 파하는 것으로 끝나는지, 아니면 법연 스님의 의도대로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귀일(歸一)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법통이 뭐 길래! 법연 스님 스스로, “난 법통을 차지하기 위해 무(無)를 깨닫지 못했으니 껍데기 불(佛)만 핥은 셈이다.”라고 뉘우치지만, 법통의식(法統意識)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하여튼 법연 스님은 침해를 통해서 가식(假飾)에 찬 법통의 길을 걸어온 그의 삶을 참회하고 싶었던 것 같다.
법통 싸움의 2라운드는 침해의 길벗 도심(度心)행자와 경원 스님의 대결로 이루어진다.
경원스님: “저 나무에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
도심행자: “내가 저 나무를 흔들어 불성을 쫓을 테니 똑똑히 보시오”
이 싸움은 올깎이들의 대표, “나는 법통은 싫다.”고 다짐했던 도심 행자의 승리로 귀결된다.
(신수와 혜능의 법통 싸움, 혜능의 법통에 대한 혜명의 도전, 신수에 대한 혜능의 승리 등을 생각 할 수 있다.)
침해는 경악하지만, 법연은 “무불당(無佛堂)!”의 외마디만 남긴 채 그대로 입적한다. 법연의 다비식(茶毗式)날 한 스님이 법연의 그러한 파계는 침해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라 한다. 고승은 죽어 말이 없다. 그러나 그의 높은 자비심은 불도(佛徒)에게 감명과 교훈을 주었다. <파계>는 불법에 뜻을 둔 젊은 선승(禪僧)들의 방황을 통해 계율과 인간적 가치의 충돌, 파계와 불법의 수행, 진리의 탐구를 보여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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