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휘날리며/올드보이/보리울의 여름-유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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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휘날리며(자아각성)
1000만 관객 등이 본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는 형제가 서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만 결국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북으로 나뉘어져 서로 같은 동업(同業)을 풀기 위해 서로가 적이 되어 싸우고는 있지만 이 둘은 본래 한 형제이다. <육조단경>에서 6조 혜능이 홍인대사에게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불성(佛性)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으나 불성(佛性)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과 같다.
올드보이(身, 口, 意 三業)
올드보이’는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로 15년간 처참하게 복수를 당하는 주인공을 통해 신‧구‧의 삼업(三業)에 휩싸여 남에 허물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자신의 허물을 뒤돌아보게 하는 영화이다.
보리울의 여름(中道)
축구이론에 능통한 우남스님이 지도하는 보리울팀과 축구선수 출신으로 실전에 능통한 김신부가 지도하는 성당팀간의 축구경쟁이 붙는다. 한편 보리울의 성당 아이들은 우남스님이 지도하는 마을 아이들과의 축구시합에서 참패를 당하고, 하도 깐깐해서 별명이 웬수인 웬장수녀, 즉 원장수녀의 눈총을 받으면서 신부님의 적극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그런 와중에 우리를 뛰쳐나간 돼지를 성당에서 우남스님이 붙잡아주자 돼지주인은 성당에서 작은 잔치를 벌이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우리나라 축구의 백년대계를 책임질 꿈나무를 키워보겠다는 원력으로 스님이 감독을 맡고, 신부님이 코치를 맡는 보리울팀과 성당팀이 단일팀을 이루어 도내 축구강자인 읍내 초등학교 팀을 이겨 지난 60년 동안 짓눌린 보리울의 자존심을 구한다.
원래는 운암인데 남들이 하도 우남 우남하며 분간을 못하니까 그냥 우남이라고 바꿨다.는 스님의 대사는 한갓 가벼운 농담일 수 있으나터짐곧 깨침의 시각에서 보면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 수행자의 무심(無心)이 일상에 그대로 포개진 말이다. 마을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돼지를 손수 잡는 총대를 메면서도 자신은 한 입도 대지 않는 것이나, 절이니 성당이니 하는 차별심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지극히 겸손한 스님의 역할에서 그 인연에 맞게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은 계(戒)를 버리지도 고집하지도 말라는 원효스님의 中道思想을 엿볼 수 있다.
1000만 관객 등이 본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는 형제가 서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만 결국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북으로 나뉘어져 서로 같은 동업(同業)을 풀기 위해 서로가 적이 되어 싸우고는 있지만 이 둘은 본래 한 형제이다. <육조단경>에서 6조 혜능이 홍인대사에게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불성(佛性)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으나 불성(佛性)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과 같다.
올드보이(身, 口, 意 三業)
올드보이’는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로 15년간 처참하게 복수를 당하는 주인공을 통해 신‧구‧의 삼업(三業)에 휩싸여 남에 허물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자신의 허물을 뒤돌아보게 하는 영화이다.
보리울의 여름(中道)
축구이론에 능통한 우남스님이 지도하는 보리울팀과 축구선수 출신으로 실전에 능통한 김신부가 지도하는 성당팀간의 축구경쟁이 붙는다. 한편 보리울의 성당 아이들은 우남스님이 지도하는 마을 아이들과의 축구시합에서 참패를 당하고, 하도 깐깐해서 별명이 웬수인 웬장수녀, 즉 원장수녀의 눈총을 받으면서 신부님의 적극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그런 와중에 우리를 뛰쳐나간 돼지를 성당에서 우남스님이 붙잡아주자 돼지주인은 성당에서 작은 잔치를 벌이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우리나라 축구의 백년대계를 책임질 꿈나무를 키워보겠다는 원력으로 스님이 감독을 맡고, 신부님이 코치를 맡는 보리울팀과 성당팀이 단일팀을 이루어 도내 축구강자인 읍내 초등학교 팀을 이겨 지난 60년 동안 짓눌린 보리울의 자존심을 구한다.
원래는 운암인데 남들이 하도 우남 우남하며 분간을 못하니까 그냥 우남이라고 바꿨다.는 스님의 대사는 한갓 가벼운 농담일 수 있으나터짐곧 깨침의 시각에서 보면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 수행자의 무심(無心)이 일상에 그대로 포개진 말이다. 마을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돼지를 손수 잡는 총대를 메면서도 자신은 한 입도 대지 않는 것이나, 절이니 성당이니 하는 차별심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지극히 겸손한 스님의 역할에서 그 인연에 맞게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은 계(戒)를 버리지도 고집하지도 말라는 원효스님의 中道思想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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